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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교역」

키타하라 지로타

세계의 어느 민족에서도 그러한 것처럼, 아이누의 역사도 주변민족과의 관계로 인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사할린으로 부터 니브흐, 윌타, 그리고 우리치, 나나이, 몽고, 한족, 만주족 등의 대륙의 민족이 있습니다. 쿠릴열도에는 캄챠카반도가 있고, 이테리멘과 코리야크, 츄크치가 살고 있었으며, 시대가 흘러 러시아인이 이주하여 왔습니다. 물론 일본의 와진(본토인)과도 오랜기간 교류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이누는 자신의 주변의 환경을 잘 알고, 그곳으로 부터 얻는 물고기, 해초, 동물의 가죽과 고기, 독수리의 깃털 등으로 주변의 민족과 거래를 하여 왔습니다. 또한 몇몇의 민족을 거쳐 중국제품을 손에 넣고, 그것을 때로는 본토에 파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물교환이 단순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지금의 교역이나 국제교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북해도산의 물고기로 부터 만든 비료로 킨키지방의 면화를 키우고, 무명제품이 되어 아이누가 이용하는 등 상호간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본관의 홈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에도 교역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교역은, 상호간 자유로운 왕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누는 배를 타고 하코타테나 동북지방까지 건너가, 자유로이 거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코타테 부근에 와진이 세력을 넓혀 마츠마에한(松前藩)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교역에 많은 제약을 받게되었습니다. 동북지방으로 건너가는 것이 금지되고, 나중에는 하코타테에 가는 것마저도 금지되었습니다. 각각의 지역에 와진이 진출해 교역을 하기 시작함으로써 정해진 상대와의 거래밖에는 할수 없게 되어 많은 부정부패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누간죠(아이누식 대금처리)나 메노코 간죠라는 말이 생겼습니다(메노코는 여성이라는 말). 아이누는 숫자라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처음, 일, 이,…십, 끝 이라고 세어 교역품을 속여 산다 라는 우스개소리로 아이누를 비웃고 천하게 취급하였다는 북해도의 구전이야기입니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아이누 간죠를 당한 여성의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속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평불만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든 것으로 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이야기속에서 불려지는 행복한 교역의 시대도 17세기경에 끝을 맞이하였습니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와의 왕래가 쉬운 지역에서는 와진보다도 이러한 민족과 더 친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북해도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옛날사람들이 사용했던 석기가 발견되고 있고, 수 만년전 부터 사람이 살고 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곧 일본본토와 같은 죠몬문화기를 맞이하여, 수렵, 어로, 채집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본토 등에서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야요이문화가 성립되었지만, 북해도에서는 벼농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죠몬문화가 계속된 조쿠죠몬(속 죠몬)문화라고 불리는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후, 북해도의 넓은 범위에서, 본토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강하게 받은 사츠몬문화라고 불리는 문화가 퍼졌습니다. 오호츠크해안가에서는 북방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여겨지는 오호츠크문화라고 불리는 문화가 성립되었습니다.

현재 전통적인 아이누문화라고 보여지는 생활양식이 성립되는 시기는 약 13-14세기경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시기의 아이누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진 것으로 최근 점점 밝혀지고 있습니다. 13세기 후반의 중국의 자료에는, 아무르강 하류역에 세력을 확장해온 원과 교역 상의 문제가 원인으로 교전한 기록이 있습니다. 17세기 초의 크리스트교선교단의 기록에도, 북쿠릴산의 고가의 해달가죽을 가진 북해도 동쪽의 아이누나 중국제의 비단직물을 운반하는 테시오의 아이누의 입항에 의해 마츠마에지역이 번영하는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츠가루해엽을 건너, 자유롭게 일본본토인(와진) 사회와의 교역도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1457년에는, 오시마반도에서 아이누의 지도자 코샤마인이 와진(일본본토인)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와진의 금속제련사가 아이누를 죽인 일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나, 본토로 부터 북해도에 이주해 온 와진과 아이누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져 왔던 것이 그 배경에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전쟁은 반복되어 일어났습니다만, 아이누와의 전쟁 중에 북해도 남쪽의 와진세력을 장악한 카기자키씨가, 16세기의 중엽에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카기자키씨는 교역으로 얻은 이익의 일부를 세금으로서 아이누의 지도자들에게 분배하였습니다. 또한 아이누와 와진이 교역을 하는 장소를 자신의 성 아래에 있는 마츠마에에 한정하였습니다.

 카기자키씨는16세기말에 성을 마츠마에로 바꿔, 토쿠카와막부로 부터 아이누와의 교역을 독점하는 권리를 인정받았습니다. 마츠마에한(松前藩)은 오시마반도 남부에 와진치(본토인의 거주지역)을 설정하고 아이누의 거주지역인 「에조치」와의 왕래를 엄격히 제한하였습니다.

 마츠마에한은 가신들에 대한 보수로서, 에조치 내에 설치된 각지의 상업장(아키나이바)에서 아이누와의 교역권리를 부여하였다(상장지행제). 아이누는 마츠마에한 이외와의 교역이 금지되고 교역의 장소도 아키나이바에 한정되었다. 이로인해 자유로운 교역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물론, 교역품의 가치도 일방적으로 내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아이누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지도자가 있었습니다만, 1669년, 그중에서 샤크샤인의 지휘아래 광범위한 지역의 아이누가 마츠마에와의 전쟁에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샤크샤인은 와진에 의해 암살되고, 전쟁은 아이누측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 후 와진 상인이 각지에서 교역이나 어업생산을 맡게되어(장소청부제), 많은 아이누가 어장에 고용되어 과도한 노동에 이용되었습니다. 1789년에는 북해도동쪽의 쿠나시리・메나시지방의 아이누가 어장의 경영자들과의 싸움을 일으켰습니다(쿠나시리 메시나의 전쟁 등으로 불립니다)만, 이것도 이러한 노동에 대한 저항전쟁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도 37인의 아이누가 처형되어 진압되는 등, 와진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지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적 상황 중에 있었습니다만, 아이누 사회는 독자의 신앙과 생활양식을 유지하였습니다. 현재 볼 수 있는 전통적인 민예도구 중에서 오래된 것은 18-19세기전반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分布図

근세의 아이누민족의 분포

 

아이누의 장로

 

 메이지시대(明治時代)가 되어 메이지정부는 이제까지의 에조치를 홋카이도(북해도)라 개칭하고, 일방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호적을 만들어 아이누를 일본국민으로 간주하는 한편, 구토인(旧土人)으로 와진(일본 본토인)과 구별하였습니다.

 정부는, 북해도의 개척을 추진하는 것을 우선하여, 선주민인 아이누의 권리나 생활을 무시하거나 묵살하였습니다. 예를들면, 장소청부제는 폐지되었습니다만, 많은 어장은 와진의 경영자에 의해 독점되고, 사슴사냥이나 강에서의 연어사냥도 금지되었습니다. 또한 토지는 개척자나 와진의 자본가에 우선적으로 매도되는 등, 이제까지의 아이누의 생활의 기반은 급속하게 약탈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정부는, 1899(메이지32)년에 「북해도구토인보호법」을 제정하고, 아이누에게 일정 농지를 부여하는 등을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면적은 와진의 농민에 비하여 작거나 농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토지가 할당된 예나, 더우기 아이누의 생활터전으로서의 토지보다도 철도등의 개발계획이 우선되는 예가 많이 볼 수있는 등 생활기반의 침식이 계속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아이누들 중에서 이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동족에 호소하는 신문・잡지 등의 논설 및 문예를 통한 운동이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라오이에서도 모리타케 타케이치와 같이 철도에 근무하면서, 1920년대부터 단가나 시 등의 창작활동을 하면서 날카롭게 사회를 지적하는 저작물을 발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의 길로 접어들었고, 아이누도 와진과 동일하게 징병제에 적용을 받아, 많은 아이누 병사가 출정을 하고, 전쟁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대 내부에서의 차별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946년(쇼와21년), 아이누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과 민족의 명예의 확립을 목적으로 북해도아이누협회(그후 북해도우타리협회로 개칭하고, 2009년에 북해도아이누협회로 다시 개칭)가 성립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북해도 각지에서 아이누문화의 전승보존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17개의 보존회가 전승하는 고식무용이, 일본의 중요 무형민속문화재에 지정되었습니다. 아이누어교실도 각지에서 개설되었습니다.

1984(쇼와59년)년에는 북해도우타리협회가 이제까지의 「북해도구토인보호법」을 폐지하고, 차별의 철폐와 경제적 자립, 민족으로서의 정치적인 권리의 획득 등을 주요한 내용으로 한 새로운 법률의 제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중에 1997년(헤이세이9년)년에는 북해도구토인보호법이 폐지되어, 아이누문화의 진흥 및 아이누의 전통 등에 관한 지식 및 보급과 계몽에 관한 법률 (아이누문화진흥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아이누문화진흥법은, 아이누의 전통문화의 진흥과 아이누문화에 관한 보급계몽을 중점으로 하고, 현재 이법률에 준한 다양한 사업이 각지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아이누와 같은 역사적 상황에 처한 사람들(선주민족)은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선주민족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은 각지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국제연합에서는 선주민족의 권리의 문제를 협의하는 장소도 설치하고 있습니다.

 북해도아이누협회의 대표를 시작으로 하는 아이누 사람들도 이러한 회의에 출석하는 등 국제적인 토론의 장에 참가해 지속적인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白老コタン

대정시대의 시라오이집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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